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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성'의 정치공학: MZ 세대론, 이남자론>

alice11 2021. 8. 1. 13:03

 

천현우 씨 글을 시간 나면 보고 공부도 하고 비평도 해본다. 계속 하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단상으로 남겨둠.

1. MZ 세대론과 이남자론에 대한 비평은 여기도 이전에 남겨두었다. 언론이 주목하는 MZ 세대가 주로 인서울 대학 출신이라는 점. 그런 점에서 천현우씨에 대한 주목은 이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어떤, 누구에 의한 응답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2. 천현우씨 탐라에 올라온 글을 보면, 그는 이전부터 글쓰기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갖고 있었고, 어딘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이미 많은 시도를 했고, 그런 시도 끝에 '발견'된 필자다.

스카이 대학의 후광과 밀고 끌어주는 선배 네트워크로 명성을 쌓은 임명묵 같은 필자와는 충분히 대조적이다.

3. 임명묵의 경우 글쓰기를 '공부' '지도' 받아서 미디어, 단행본 작업 등을 통해서 훈련을 거쳐, MZ 세대 붐에 선수로 내보내진 경우다.

반면 천현우 씨의 '발견'된 글 <이남자, 이여자의 사정:지방, 공장, 저학력, 흙수저 남녀의 처절한 생존기>는 말그대로 '당사자의 생존기'였고 '이남자'의 경험담에 이여자에 대한 '들은 이야기'를 섞어서

이남자만의 이야기는 아닌 그런 구조를 취했다.

누군가의 논평처럼 '어쩔 수 없이 마초적 부분'이 있지만 나름 사정이 있는 이남자 이야기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받았다.

4. '발견된' 필자라고 하지만 '발견'이기에 여기에는 여러 개입이 존재한다. 미디어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실상 이 '발견'에는 이남자 사정론에 주목하고, "여성 의제에 가려진 '노동의제'"를 부상하려는 일련의 집단적 네트워크가 작동한다.

산업단지 거점이었던 부울경 지역의 노동에 중심을 두고 정부 정책과 지속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그룹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시도가 '경계 청년'에 대한 관심과 일련의 기사로 이어졌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5. 최근에 발표한 미디어 오늘 칼럼을 보고 느낀 점은 천현우씨의 글은 이런 집단 네트워크의 일련의 키워드에 포섭되어가는 중이다. (물론 원래 그런 소지가 있어서 '발견'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미디어 오늘 칼럼은

주 52시간제에 대한 윤석렬과 관련한 이슈로 시작해서,

'노동현장'(지역의)에서 52시간제에 대한 '실감과 사정'을 '생생하게' 전한다. 이 사정에는 사장, 40-50대 여성노동자, 동료 남성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다양성의 지표' 역시 아로새겨진다.

50인 이상 기업장과 50인 이하 기업장의 다른 사정도 전하면서

역시 이 글은 남성 노동자의 주도적 기술 속에 '다양한 목소리'를 전하는 방식을 취한다.

칼럼 후반부는 거의 52시간제의 당위성을 설파하는데. 그 이유는.

1. 대한민국이 이제 선진국이 되었다는 점

2. 지방소멸 시대에 지방의 출산률 저하를 막기 위해서는 52시간 근로제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점

이라고 논한다.

<1>은 정부와 정부 국책 관련 연구자들이 최근 꽤 강조했던 논점이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했다는 지표.

<2> 역시 현 정부의 '변치않는' 출산률 중심 정책과 지방 정책의 논지를 반복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유명무실해졌다. 관련 보도도 이미 나와있음)

6. 천현우씨가 꼭 여성주의에 지지를 보내거나 혹은 반여성주의적이다라고 비판할 필요는 없다. 그는 그 나름의 사정에 대해서 말할 권리가 있고 그 자체가 가치가 있다.

하지만 천현우씨 글은 '지역/비대졸/노동자'의 현장 경험이라는 '자생성'의 외피를 통해서 어쩐 일인지, 현 정부의 노동 정책과 지방 정책, 특히 노동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이 비판해온 정책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고 이런 지점에 대해서는 매우 의아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6. 노동자 수기와 노동자 글쓰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잘 아시겠으나, 노동자 수기, 현장 경험, 날것의 생생함 등이 '전유'되고 도구화된 역사 역시 간단하지 않다.

노동자 수기는 오랜 세월 현장의 생생한 경험을 알리는 '근로수기'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말살하고 '근로자 정신'을 체화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기도 했다.

이건 이른바 좌파 정치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그런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선진국 진입, 지방소멸에 대응하는 유일한 선택으로서 출산률을 높이기 위해 52시간제가 필요하다 논의는 정부의 정책을 선전하는 문건에서 반복해서 나타난다. 하물며 이른바 '친정부적 논조'를 실어나르는 기사라고 해도 이걸 생생하고 노골적으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천현우씨 칼럼에서는 그게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당사자'이고 '생생한 현장 경험을 담은 수기'이기 때문이다.

7. 역사적으로도 이렇게 노동자의 '당사자성', '자생성', '생생한 날것의 경험'을 전유하고 도구화하는 과정은 국가 정책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언정, 노동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된 적이 별로 없다. 물론 누군가를 주목받는 존재로 만들기는 하지만.

8. 나아가 천현우씨 글이 마치 '진보'와 '노동의 최전선'인것처럼 감싸고 도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꽤나 기시감이 드는 일이다.

****여러번 강조했듯이 이 모든 문제가 '천현우씨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글은 친구공개로 둡니다. 블로그에는 올려두겠습니다. 페북에는 '이때다, 공격' 이렇게 또 붐이 불 수 있어서, 그런 방식 역시 동의할 수 없기에 비평으로서 남겨두고자 합니다.